김영우의 전생여행 - 지혜의 목소리 -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과 같이, 선한 행동을 유발시킨 그 동기가, 자신이 갈 곳을 결정하게 됩니다... 생명의 파괴는 가장 무서운 테러행동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 보존하는 것입니다...  질서 속에서의 죽음이 아닌 것은 범죄요, 죄악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못된'곤충들을 굳이, 일부러 죽이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생명체는 그 나름대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으며, 그 존재이유가 소멸된 이후라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이 옳지 않다는 것 입니다... 또한 벌레조차도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본질적인 존재인 그 생명이 개체적 삶의 존재 이유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것도 손을 대서는 안 됩니다... (어둡고 슬픈 어조로) 지금, 물질문명의 환경파괴는 이러한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과정이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환경 파괴를 막는 방법은... 지금의 환경운동 방법은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더 좋은 환경에 살고자 하기 때문에 환경파괴를 막고자 하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환경보호는 생명에 대한 경외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환경이 파괴됨으로써 일어나는 개체적 삶들의 무수한 파괴... 그러한 파괴들을 막으려는 열망이 있을 때에 진정한 환경보호가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더 안전한 삶을 누리려고 좋은 환경을 찾고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하지만, 이것은 극히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환경보호를 떠나서 생명존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존중과,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 가운데 내가 순종하고  그 법칙으로 살아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이루어질 때 인류가 살게 됩니다...  도(道)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알 때  첫걸음을 떼게 됩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보이고, '존경'이라는 단어가 보입니다...  그리고 샤머니즘적, 무속적 상징들... 진리에 대한 출발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경과 존중에서 시작됩니다...  관계의 단절과 파괴, 이것은 각 개체적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일례입니다...관계의 단절은 그 개체적 삶을 존중할 때만 비로소 회복됩니다... 이상입니다.

- 긴장을 풀고 편히 쉽니다. 또 다른 메시지가 있으면 들어보십시오...

구두주걱이 보입니다... 구두주걱은 사람들이 신을 신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입니다.  남을 도우려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구두주걱의 비유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존재하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를 끊임없이 반문하고 질문하십시오...  이것이 자기 안에서 다져지고 굳어질 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생명을 망각하는 사람은... 생명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은 이렇게도 된다는 것입니다... 생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사건들은 그것이 큰 깨달음으로 연결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죄지은 행동들을 깨닫게 될까요...?   눈을 가지십시요. 지금 살아 있는 생애에서, 정말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큰 감동을 가지고 사십시오.  생을 바라보는 눈은 순수함에서 출발합니다...  이타적인 사람이 맑은 영혼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이타적인 행위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가운데서 자신의 영혼이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정제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삶이 많은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삶은 하나의 수단적인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도왔다고 해서,  그 도움 자체가  나에게 무슨 보상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과정 가운데서 내 영혼의 눈이 떠지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크고 강한 어조로) 누가 가장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는 사람입니까?  악을 행하는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 행위 때문에 영혼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십시오... 순간순간을 감동으로 사십시오... 사람이 받는 고통은 그 안에서... 내면 세계에서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로 새롭게 자기를 얽어매는 멍에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당신을 해치려 들면 그대로 맞으십시오. 오히려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당신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려는 영혼을 만난다면  대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 대결은 다음 생에서 당신을 더 어렵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을 괴롭게 하는 데 집중하지 마시고 당신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데 애쓰십시오. 모든 진리에 도달함에는 많은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게 함으로, 또는 기쁘게 함으로 진리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데 방해가 되는 행동이나 삶을 살지 마십시오.  참 자유를 누림으로  그 마음을 확장해놓고 많은 사람을 담으십시오.  용서는 참 자유입니다.  진리를 가진 사람은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소유하려 들지 마십시오.  모든 문제는 소유에서 나옵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때 당신은 미움의 관계와 저주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주십시오. 가진 것을 준 자리에 그 만큼의 자유가 채워질 것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십시오. 사람으로부터 위로나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성장을 방해하게 됩니다.  자기 내면을 바라보고  자기 영혼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누구도 당신을 해치거나 당신을 어렵게 하지 못합니다.  신의 영역에 있는 당신의 영혼을 누구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당신을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 멸망시키려는 사람들,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허상과 실상을 구별하시고 허상을 좇지 마십시오.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그 미워하는 행위와 당신을 따돌리고 어렵게하는 그 마음들은 허상입니다.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그 구속된 마음을 바라보시고 그 영혼의 결박에 집중하십시오. 그것이 실상입니다.  죄를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볼 때 당신의 영혼은 무한히 확장되고 그 만큼 당신은 자유롭게 됩니다. 이 진리를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생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해명하려 들지 말고 자기의 모습을 정형화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정형화될 때 또 자신은 구속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담을 그릇이 되려면  (속삭이듯)  자기가 정형화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선한 의미에서든지, 다른 의미에서든지 정형화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원래 가지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합니다.  무엇이 당신을 괴롭히려 해서 너무 힘듭니까?  사회적 지위와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평가가 당신을 그리로 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착 같은 것은 허상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허상이 욕심을 만들고, 욕심이 질투를 만들고 강박을 만듭니다.  그것이 당신뿐 아니라 많은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끝내는 관계의 단절과 괴리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형화시켜서 그 안에 안주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억울함에 대해서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정형화시키지 않는 가장 큰 훈련은, 억울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출발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허상을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자기를 모함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 속에는 큰 것이 담겨 있고, 큰 것이 작은 것의 부분입니다. 우주는 한 점이고...  이 점들이 모여 더 큰 우주를 이루게 됩니다. 시작이 없는 것처럼 끝도 없습니다.  누가 부처입니까?  부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부처입니다.  작은 부처들이 모여서 큰 부처가 되고 바로 우주에 있는 부처가 각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작은 것이  큰 것을 품고 큰 것이 작은 것을 품는 것입니다. 생명의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주에 있는 최고신의 일부분을 이루게 되고, 그 우주 최고의 신은 각 생명마다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시작이고 무엇이 끝입니까?  소유함으로 시작에 이르고 그 소유를 놓을 때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영혼 사랑 하기를 힘쓰고 그 안에 간직된 하느님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을  우상화하는 것은 그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를 우상화시킬 때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 그 우상화된 사람의 모습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 욕심을 따라, 또 많은 사람들의 욕심에 따라 만든 허상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은 또 역으로 악인에 대해서, 그 악인의 영혼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악인의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 죄가 만들어낸 허상에 집중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릅니까?  나에게 선한 일을 해준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내게 이익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을 선하게 바라보는 것과, 나에게 악한  일을 행했을 때 그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결과가 만들어낸 이미지, 그 것만 기억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을 악하게만 생각하는 것과, 행위 때문에만 선하게 생각하는 것은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안에 깃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 안에 품어져 있는 큰 것을 보고,  큰 것을 보면서 작은 것 속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강한 어조로)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는  영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동물들도 영혼이 있지만...  사람들의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맹목적인(?) 작용처럼 보입니다...  모든 사랑의 흐름은 같다고 하지만, 동물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의 차이점은...  동물적 사랑은 하나의 경향입니다...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경향들은 감정의 움직임대로 가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과의 교감을 통한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사랑이 좀 더 저급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최상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생명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성간의 교합이나 가족간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주된 흐름이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우주 안에 있는 순수한 에너지와 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랑 받는 대상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우주에 있는 에너지를 자기가 소유하고, 그 영혼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가지고 있는 신비 중의 하나는, 사랑을 할 때에 사랑받는 사람 보다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더욱 더 큰 힘을 얻게 되어 내면적인 성숙이나 개인적인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두는 것이 아니라 열어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적 차원의 사랑에서 머물게 됩니다.  즉, 타고난 경향대로의 사랑, 생존본능에 근거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또한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사랑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일부 소유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무조건 동물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들, 감정이 앞서는 사랑들은, 그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목적을 가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존적 목적을 가지는 사랑을 하게 되지만...  아...  너무 많은 메시지들이 쏟아져 들어와,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침묵한 후)  남자가 여자를 사랑 할 때에, 그 사람의 영혼을 보지 못하게 되면, 자손을 번식시키고자 하는 맹목적인 의무감이 그를 충동질 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 해주는 사람에게서 왜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게 될까요...?  그것은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다는 동물적인 감정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사랑입니다...  왜 부모들은 자녀가 더 잘되거나  더 성취하기를 원할까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대리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얻으려 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출세를 하려고 합니까...?  그것을 얻을수록 점점 더 자신의 존재기반이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본질적인  힘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은...  생존을 뛰어넘어...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살리는 사랑을 할 때에 비로소 모든 것이 완전해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힘들거나 다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존권이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밟아서라도 자신이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법칙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짓밟거나 침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강한 어조로) 소유함으로 얻는 것은 다분히 현상적인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자기를 내어 놓음으로써 자기 안의 악한 기운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자유로워진 만큼의 우주의 선한 기운들을 자기가 받아들여, 자신의 영혼이 더욱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동물적으로 사랑하는 자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저 차원적인 개념의 사랑도 안아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적인 관점에서의 사랑과의 차이점은, 그것이 의례적이고, 찰나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결과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원리에 부합되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며 영원하며, 영속성이 갈수록 빛을 더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딴 사람을 사랑할 때, 에로스적인 사랑이든 아가페적인 사랑이든 왜 사랑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에로스가 주류가 될 때는...  실상은 자기만족적인 사랑이 됩니다...  결국은 서로에 대한 실망만 남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자신의 생존영역을  서로의 사랑을 통해서 확인받고 확인해야 하는 건데, 그렇지 못할 때는 양립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로 시작한 부부사랑은 갈등으로 서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고...  그 갈등으로부터 다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암묵적인 휴전과 묵시적인 경계를 정하고  그 선을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서로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적인 관점에서 부부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서로의 영혼의 발전을 위해서 기뻐하게 되고...  우주의 원래적인 흐름 가운데 자신이 머물려고 하게 됩니다...  자기를 비우려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이 안에 들어와서 무한히 확장되므로, 또한 내 안에 있는 우주적 기운들을 나를 통해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의 부부사랑은 끝없이 끝없이 사랑이 자기지속성 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주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뤄내야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면...  겉치레나 위선이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된 모습이 없이도  서로가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우주의 기운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족적인 사랑으로 자녀를 대할 것이 아닙니다...  (잠시 침묵한 후)... 부부간의 진정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들, 또는 만족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서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 받아들여진 상처들 때문에 그 상처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냥한 미소 속에 차가운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담기게 되고, 미소를 지으면 지을수록 상대방으로부터 멀어지는 서로의 모습이 있을거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뜨려야 됩니다...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 기운들이 교감되면서 느껴지게 되고,  차가운 기운으로도 뭉쳐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공통된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의 사랑이 원리를 생활에 적용시키십시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 카르마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 '이카루스'에 대해 아십니까?

 - 네. 계속 하십시오.

제 앞에 그림이 보이는데... 글자로는 '이카루스'라고 나오고 그리스 신화에서 새의 깃을 달고 날려고 했던 그 사람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영역에서 이카루스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 인위적으로 영을 이해한다는 자만에 빠진다는 얘깁니까?

 ... 깃털을 다듬고 붙이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가지고 날려고 시도할 때는 떨어지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우리의 행위가 중지되어야 할까요...? 깃털을 모으는 것부터 중지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명확히 인식할 때에만,  진리를 소유하고 우주의 비밀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데에는 두 세가지의 부류가있습니다.   한 가지는 자기가 신인 양 착각하므로 태양 곁에서 자기 몸을 녹여 버리는 자가 됩니다.... 또 한 부류는, 원래의 신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신을 좇아가다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럴 듯한 도덕률로 가장하고, 인간의 능력에 대해서 너무나 과신하는 부류입니다....  (엄숙하고 강한 어조로)  이들은 모두가 실패하게 됩니다....  모든 영혼은 피조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나눔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신의 부분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과 유사한 능력과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우주로부터 오는 흐름들을 막게 됩니다....  원래의 진리, 원래의 신을 왜곡된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도 진정한 교류가 사라지게 됩니다...



...코끼리의 배설물을 보면 코끼리의 흔적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큰 사람은 큰 흔적을 남기고 작은 사람은 작은 흔적을 남깁니다...  누구를 평가할 때는 그 흔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인내를 가지고 그 사람의 영혼에서 그 흔적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흐려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된 이미지와 정보를 통해서 자신의 흔적을 커다랗게 남기려고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그것들은 마치 배설물이 썩을 때처럼, 썩고 마르고 위축되어 흔적도 남지 않게 됩니다....  코끼리에게서 나온 배설물만이 정녕 코끼리의 것이요, 그것이 태양에 썩어져 없어지더라도 코끼리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 메시지의 의미를 목소리들이  제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코끼리가 배설물을 싸놓으면 그것은 사람에게 코끼리가 지나간 흔적임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태양에 의해 마르고 부서지고 흔적조차 사라지더라도 코끼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코끼리가 아닌 것이 자기 허세를 위해 그런 커다란 덩어리들을  뭉쳐만 놓는다고 해서 자기가 정말 코끼리가 될까요?  원래 자기의 것이 아닌 허상들을 커다랗게 내놓고 자기의 생산능력이 아닌 것들을 거짓으로 내놓는다면 시간이 흘러서 그것이 사라질 때에, 결국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즉, 코끼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보의 덩어리로 나오기 때문에 말을 더 잘 전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서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지만, 그의 흔적들은 시간이 가면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흔적들은 계속해서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잊혀지더라도 다시 생산되고, 계속 생산됩니다....  즉, 그 사람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혼을 소유한 사람일 때에, 그것이 아무리 많이 생겨나고, 또 잊혀진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숨기고 부끄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서, 마치 자기가 그러한 영혼을 소유한 것인 양 이미지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 것이 사라지고, 때가 지나서 기억에서 지워질 때는 그 존재흔적조차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왜곡된 이미지를 많이 만들어서 허탈한 결과를 만들기보다는 우리의 영혼들을 그런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칭찬, 명예, 선한 것들....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높이 평가하겠지만, 정녕 내 안에 그런 영혼이 없을 때는 오히려 그것이 더 허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속일 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서 내놓는 진실된 열매들을 녹여낼 수 있는 영혼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 것에 집중하십시오....  결과물들을 내놓는 것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코끼리는 자기가  배설물을 내어놓고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나아갑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코끼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면들이나 선한 행위의 결과에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에 집중하게 될 때 우리는 허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을 때, 나의 흔적들을 보면서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것이 되지 않고 그런 허상들을 만들어내게 된다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따라오겠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그 근원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코끼리가 아니라 쇠똥구리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끼리를 찾으려 하겠지만, 코끼리는 없습니다.  대신 그것을 만들어냈던 쇠똥구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코끼리의 배설물을 보고 코끼리를 찾다가 쇠똥구리를 밟을 것입니다...  많은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은 헛된 것을 좇아가고 자기 그릇에 맞지 않는 생산을 내려고 하고 자기를 위장하려고 하다가 그만 발에 밟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그런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코끼리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당신은 코끼리입니까, 쇠똥구리입니까....?  쇠똥구리는 덩어리를 작게 만들어 오히려 자기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큰 덩어리를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코끼를 찾아가려다가 그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개구리 그림이 보입니다....  개구리가 목젖을 힘껏 부풀려서 끄르륵끄르륵 울 때, 그 소리는 산을 진동시키지만 개구리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구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호기심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나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보였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개구리지만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큰 울음소리를 내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는 그 큰 소리를 내면서 만족할지 모르지만 듣는 이들은 그것이 개구리 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그런 개구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속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  내 모습을 보십시오.... 내 안에 개구리는 없습니까...?  내 안에 쇠똥구리는 없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거품을 없애야 합니다....  영혼의 거품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원래의 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아무도 나를 탓하거나 멸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 앞에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개구리요, 쇠똥구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자기도 코끼리인 양 착각하고 지내지만 결국 쇠똥구리입니다....  산이 울린다는 것 때문에 자기 울음을 호랑이 울음으로 착각하지만 결국 개구리울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더 크게 울부짖으려 하다가 자기를 찢어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내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자기가 갈 길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신이 될 수도 없습니다.

- 우리의 성장은 실제로 남들의 영혼을 사랑함으로써 가능합니까?

그것은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 종속변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성장하게 되고, 성장하게 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사랑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내 안에 겸손함이 있다는 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존재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겸손입니까?  머리를 숙이는 것이 겸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부모에게는 머리를 숙일지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한마디의 말로 그 존귀함을 인정해줍니다...  겸손이란 한 존재의 존재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경해야 될 사람을 존경하고, 다독거려줄 사람을 다독거리고, 내가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겸손이지요....  사랑은 겸손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므로 당신 안에 얼마만큼의 겸손이  있나를 보십시오....  그것이 자라고 있으면  당신의 영혼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영혼의 성장과 진리를 찾는다고 자기수련을 하는 많은 움직임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기술적인 면과 초능력에 관심을 가지는 것 말입니다...

(단호하게)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을 좇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들에 혹하는 사람들은  일만 명 중의 일만 명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나아가고, 일억 중의 일억도 자기만족을 위해 나아갑니다....  저 셀 수 없는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 중에, 단 몇십만, 몇몇만이 진정한 영혼의 성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성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그 성장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얼마만큼 성장하느냐의 관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된 것을 보고 내심 흡족해합니다....  그것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또한, 자기 만족적 방향으로 흐를 때에는, 그것을  쌓아 나갈수록 자기를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  우리가 남을 섬기려 할 때는 딱딱한 콩과 같아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물에 불리고 돌에 갈아서 자신의 모습을 사그러뜨려 두부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먹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많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는 바로 이런 두부가 되는 과정입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이 딱딱한 마음들을 불리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껍질을 벗겨야 하며,  원래의 형상조차 깨부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모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선하게 살기로 했는데 많은 고통이 있다면....  맷돌에 가는 것처럼 고통이 있다면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옳지 못한 것들이 갈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콩을 맷돌에 간다고 그 화학적 성분이 달라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섭취하기 힘든 물리적 성질만 달라질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께서 주시는 시련과 인생의 고난을 통해 그것들을 갈아내고 순수하게 정제되어야 합니다...   ...  내 안의 진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사랑과 겸손입니다...  겸손함으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희생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겸손함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것으로 희생하고 그 희생으로 많은 것들이 선하게 될 때, 그것이 내게 참 기쁨이 된다면 그것은 우주의 진동과 자기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 많은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따르는 것만으로 마치 호랑이가 된 듯이 생각했습니다....  코끼리가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구 울어댔고, 굴려댔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겸손하고 사랑이 있는 자가 나타났을 때, 그들의 허상이 무너지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겸손은 모든 것의 실상입니다...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진리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 중에 겸손은 밭이고 사랑은 열매입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열매가 중요하지요...  그러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없이 어떻게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왜 저들은 저렇게 시끄러울까...?  그러나 자신의 그 비웃음 소리가 바로 개구리 울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 영혼의 거품을 덜어낼 때 참으로 나는 자신이 내고 있는 개구리울음소리를 들을 것 입니다...  내가 굴리고 있는 헛된 것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 손을 떼야 합니다...  내 안에 참 열매가 자라도록 자신이 디디고 있는 존재의 바탕을 살펴야 합니다...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진정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영혼을 사랑할 수도 없을뿐더러...  영혼과의 공감과 공명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선, 허세, 가려진 것들을 모두 제거하기 때문에 너무나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슴에는 우주의 진동이 담겨 있고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울림으로, 수수깡으로 집을 지은듯한 사람들의 그 위선과 세상이 주는 헛된 자랑거리들을 쓸어 버리게 됩니다...  이 시대는 자기를 바라봄으로 스스로 부끄럽게 된 사람들이, 자신을 가림으로 스스로 높게 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강한 어조로) 이제까지는 사람들의 위선과 허상이 그대로 지켜지고 이어나왔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뀔 것입니다....  (탄식하듯) 참으로...  참으로  자기를 스스로 부끄럽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기 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자기비하가 아닌 부끄러움으로, 사람들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그 마음으로 많은 영혼을 품어주고 ...  영적인 성장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잠시 침묵한 후) 술병 속에 담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술은 자신의 성질이 변화되어서 사람들을 취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랑이라는 효모를 채워야 합니다...  사랑이 채워지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발효되어서 원래의 우리 모습과 우리의 맛이 새로운 성질로 변화되면...  그것이 사람들을 취하게 합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발효시켜야 되겠지요...  술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발효시키고, 그것으로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좋은 포도가 좋은 포도주가 되고, 나쁜 포도는 질 낮은 포도주가 됩니다.  자신의 포도밭을 관리하십시오...  향기로운 향을 내는 포도주를 생산하십시오...  (잠시 침묵한 후) 쌀뒤주가 있습니다...  쌀벌레가 쌀을 파먹는 그림이 보입니다...  쌀뒤주 안에 있는 벌레는 그 수명이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더 이상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메시지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 질문은 해도 될까요?

네...

- 지구상의 인구가 자꾸 늘어나는 이유는 뭡니까?

... 새로운 경험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한 영혼이 여러 육신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게 되면, 인구는 정리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면..
인구는 지금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들게 됩니다... 한 영혼이 많은 몸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고,  악은 더 악해지고,  선한 것은 더욱 선해질 것입니다...

- 지금도 한 영혼이 여러 몸을 가진 경우들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 인구를 10분의 1로 줄이는 것은 재난과 질병입니까?

 ... 그렇게 되지 않기를 ... 바랍니다.

 - 그것은 인간들의 행위와 각성에 따라서 유동적이라는 말입니까?

... 그것은 마치 데생이나 스케치를 한 후에 수채화로 할 것인지 유화를 그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범위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지만 그 안에서의 현상은 사람에 의해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  그 때 육신을 잏은 영혼들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깨닫지 못한 채 어디로 돌아갑니까?

 ... 다시 뭉치게 될 것입니다...

 - 하나의 큰 덩어리로요?

아니오...  우선은  하나로 합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모든 영혼이  하나로  합친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그 모습을 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딘가로 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심판의 모습, 재판정이 이미지가 떠 오릅니다...

- 다른 곳으로 가서 각각 심판을 받게 됩니까?

 ... 지금 제 머릿 속에는 심판에 대한 개념과, 모든 영혼이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개념이 같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 심판을 받은 후 각성에 이르고 다시 성장을 계속한다는 뜻인가요...

...그것은 사람의 지혜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광대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자기를 속박하고 자기와 관계맺는 사람들을 어렵게 할 뿐입니다.  참된 진리탐구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발전하고 그  영혼들이 정화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혼을 맑게 해주지 못하는 수행은 자신을 치장하는 요란한 많은 치장물 과도 같으며,  돈 많은  여자들이 허영으로 치장하듯이 자기를 꾸미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더욱더 위험한 것은, 허영에 찌든 사람들은 누가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지만 정신적인 허영은 아무도 지적해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영혼이 피폐되는 줄도 모르면서 병들어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썩어가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참된 수행의 길은 내재된 자신의 깨달음으로,  섬기고 돕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입니다.   도(道)의 완성은 사랑인데...  사랑의 전제는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희생하십시오...  희생의 모습이 남들 보기에 파계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이단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희생하십시오...  희생이 있은 후에야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행하는 자만이 도를 이룬 자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노력들은 허공을 울리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ㅇㅇㅇ환자 자신을 가리킴)의 생애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많은 날들을 반복했건만, 깨닫지 못하고 같은 굴레에 속하는 것은 진정으로 섬기는 데 약했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잠시 침묵한 후)  ...  희생해야 합니다...  그것들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영혼들은 보다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불상이 보입니다..

- 무슨 의미죠?

(잠시 침묵 후) 부처님 같기도 하고 예수님 같기도 한 분이 오셔서... 제게 손을 대고 " 너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 긴장을 풀고 들어보십시오...

 사람은 자기 생에, 주어진 생의 의미와 목적대로 사는 것...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도(道)라고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놀라운 지혜나 지식이나 초능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 원래의 자기를 원래의 모습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도'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 자기'를 볼 수가 없기에 그것을 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그러나 '이런 방법이 참된 도다, 저런 방법이 참된 도다.'하고 말들을 많이 하지만...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 즉 자기를 살피고 '내가 누구인가' 를 바로 아는 것이 수행이요 참선이라고 합니다...계율이나 율법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를 가리려고 하는 요소들, 명예, 공명심, 욕심과 탐욕, 미움, 시기, 질투, 이 모든 것이 자기를 발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하나의 한시적인 도구입니다...  '참 자유'는 자기를 바라볼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알 때에 주어집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도'의 출발이요 완성입니다...  내 안에 있는 무한(無限)은 하늘나라를 담을 만큼의 공간들입니다... "원래 악하지 않은 인간을 스스로 악하게 했다." 고 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서경덕'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그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 서화담을 얘기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도 도를 깨치지 못했고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자기의 수행이 헛되다는 것을 알고...  다음 생에서 자신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죽었다고 얘기합니다. 많은 도인들...  원효대사 같은 사람들도  저 높은 곳에 도가 있는 줄 알고 힘차게 달려갔지만, 결국 이 '도'의 본질을 바로 알았기에 나중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원효대사 같은 분은 도를 깨달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하나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다  버릴수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영상과, 영상에 담긴 함축적 의미들이 있는데, 말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옷의 디자인이나 재질이나 색깔을 보지만, 옷에 대해 바로 아는 사람은  그 옷이 어떤 실로 만들어졌는지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옷이 화려하더라도 그 옷이 짜이기 전에는 한 가닥의 실어었다는 것입니다...  '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실에 집중할 수 있는 것...  그 실에 집중하고, 화려하거나 비천하거나 볼품없는 옷이라도 그 종류와 상관 없이 그것이 모두 한 올의 실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바로 보고, 그것을 통합해서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를 깨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미약하지만 하나의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은 그 한 올의 실을 어떻게 엮어 나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한 올의 실이 고기를 잡는 그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옷이 되기도 합니다.  밧줄이 되기도 합니다...  아...   저의 그릇으로는 이런 영상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완벽하게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화합은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 때...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빈 것...  비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심장이 비어야 새 피가 들어가고, 위장이 비어야 새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물통의 물이 비워져야 새 물이 차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나 진리나 지식을 자꾸 비우십시오.  그 만큼 새 것이 찹니다. 진리는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인데, 지식이 진부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진부하다면 또 버리고,  또 채우십시오.  버리고 채우는 가운데 참 진리를 알 것입니다.  다시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인과 부정의 역사는 끝나고, 확장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넓히고 비워야 그 안에 상대의 사랑이 채워집니다...  누구를 처음 사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고 합니다...  사랑할 때는 자기 마음이 온전히 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이 우리를 오염시킨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토인이 북을 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빈 북이 큰 공명을 내고, 북의 이편과 저편 사이가 비어 있지 않으면 울리지 않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내 영혼이 비어 있고, 채워지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의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어야 합니다...  나를 알지 못할 때,  나를 알려고 무엇인가로 채우게 되고, 그로 인해서 공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를 알게 되면  더 이상 헛된 것으로 나를 치장하려 하지 않고 그럼으로 드디어 내 속은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속은 텅 비어서 내 것들을 더 크게 울려냅니다...  그 공명은 더 커집니다...  가장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가장 크게 비어 있습니다...  지식이나 진리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자기를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그것이 디딤돌이 될 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코를 괴롭히는 썩은 재료가 될 것 입니다...  누가 가장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더 많은 지식을 쌓으려 하고 더 많은 수행을 하려 했던 사람들이 도를 알았을 때, 그 자신의 헛된 노력들로 인해 부끄러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필연적인 과정이 되겠죠...  "사람을 사랑하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먹다 남은 갈비처럼 뼈에 살이 얼마남지 않은 것들이 계속 날아다니는 그림이 보입니다...  어떤 교훈이 담겨 있는데...  정리가 잘 안 됩니다...  낚시터에서 지금 낚싯대를 드리우고...  미끼를 따라  큰 고기와 작은 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리는 그림이 보입니다...  두 가지 대비되는 그림이 보입니다...  고래 잡을 때, 작살로 잡을 때에는 속이지 않고 바로 공격한다고 합니다... 도를 닦는 것은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작은 것을 낚을 때 쓰는 방법을 큰 것을 낚을 때는 쓸 수 없습니다.  즉, 크게 깨달으면 기존의 방법이나 기존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작은 고기를 낚는 방법에 익숙해져서, 큰 고기 낚는  방법을 모릅니다...  참된 진리를 알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자기 기준을 버릴 것에 대해 말하고...  규정짓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 가는 길이다' 라는 식의 규정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생퇴행을 통해서 마스터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쌓아놓지만, 이것이  다 먼지가 되는 그림이 보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우리의 삶이 바뀌지만, 때가 되면 다 버려야 된다고 합니다...  절대로 쌓아두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버리지 못하면 자기를 썩게 만들고 새것을 받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단이요 과정이지, 이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려면 자기를 구성하고 있던 하나의 껍질을 부정해야 되는 것처럼, 참진리에 가는 길은 우리가 옳다고 했던 마스터들의 목소리까지도 부정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더 강한 긍정이라는 것...  부정하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수행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합니다...  각자는 각자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이죠... 자기를 바로 보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선도 악도 다 볼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것...  진지한 대화...  (강하게)  당신의 마음을 역동하는 진리로 채우십시오.  살아 있는 것으로 채우십시오...  마스터들이 선생님께 질문을 합니다.  이때까지 선생님이 배워왔던 지식들...  지금 볼 때 그 것들이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묻습니다....

- 대개는 죽은 것이죠...고정된 것입니다...

 지금 마스터들이 선생님께 얘기하고 대답을 듣기 원하는데... (강하고 열정적으로)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은 것이 전혀 가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새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죽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것을 받아들였을 때는 죽은 것처럼 여기고 자기를 비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완성의 경지로 이끌 것입니다...  이 전생퇴행의 방법이 당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새로운 진리에 접근하게 하겠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죽은 지식으로 아십시오.  이것에 집착하지 마시고,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더욱더 확장되어야 하며, 새것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그렇게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끌 것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바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그 편협하지 않은 사고를 존중합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정말 예수를 믿는 진정한 성자가 되려면 예수를 욕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이것은 예수를 존경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틀에 박힌 예수의 모습을 깨뜨리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화석화시키지 말라." 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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